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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치를 처음 만난 건 아주 화창하고 따뜻한 여름 날이었다. 때는 수년전..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휴가를 이용해 큰아버지 댁으로 놀러를 갔을 때였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듯 시골은 언제나 신기한 동경의 대상이다. 마음 것 뛰어 놀 수 있는 들판, 이리 저러 깔려있는 놀이거리, 도시에서는 맛 볼수 없는 색다른 체험들. 모든 것이 신비롭고 신나는 자연의 놀이터. 그곳이 그때의 어린이들이 인식하는 시골이다.물론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큰 아버지 댁에 도착한 나는 남들과는 다른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폭력과 구타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저번에도 말했지만 큰 아버지 댁에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한시연. 나와 동갑내기의 그 아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의 왈가닥에 성격파탄자로 실크로드가 깔린 내 인생에 주먹 만한 오점을 남긴 내겐 웬수 같은 기집애이다.
그날도 역시 그 웬수같은 기집애의 마수에 걸린 나는 갖은 고문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쪼그만 기집애가 어디서 보고 왔는지 프로레슬링 기술을 날려가며 내 몸을 유린하는데 그 공세가 어찌나 매섭던지 비 폭력주의자에 평화주의자인 간디를 존경하는 나로서는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솔직히...힘이 딸린 이유가 더 크긴 했지만 중요 한게 아니니 일단 넘어 가자.
결국 녀석의 폭력에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린 나는 부모님들을 찾아가 일러도 보았지만 당시 시연이 기집애의 가증스런 애교공세에 빠져있던 부모님들이었기에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날아온 것은 옆에 있던 누나의 차가운 놀림이었다.
<사내자식이 되가지고 계집애한테 맞고 울고나 있고...고추는 왜 달았냐?? 떼서 장이나 담가먹지...챙피한줄 알아라...>
<씨....미워!!다 미워!! 나 갈 거야!! 집에 혼자 갈꺼야!! 누나랑 아빠랑 엄마랑 셋이서 여기서 평생 살아라!>
억울했다. 엄마도 아빠도..누나야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라고 쳐도...자식편은 한번도 안들어 주고 그 나쁜 기집애만 이뻐하는 부모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 원망스러운 마음에 나는 주워온 자식일꺼란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어 진짜 엄마 아빠 찾으러 간다고 하며 집까지 나와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막상 소리를 치고 나오긴 했지만 정작 갈 데는 없었다. 아는 동네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시골이었기에 가뜩이나 얇은 유리 같은 심약한 마음을 가진 나로서는 어딘가로 섯불리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가기에는 어린마음에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게 멀리 나가지도 그렇다고 도로 들어가지도 못하던 나는 결국 집 근처에 있던 가까운 창고로 몸을 숨겼다. 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쌓여져 있는 짚단위로 일단 몸을 뉘우자 창고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농가의 창고 아니랄까봐 안에는 낫, 가래, 쟁기, 괭이등 여러 종류의 농기구들이 안을 가득 메워 보기에도 섬뜩한 기분을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조금 밖에 들어오지 않는 햇빛 탓에 어둡기 까지 않은 창고는 말 그대로 귀곡 산장이라는 말이 딱 떠오를 정도로 음산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절로 연출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자다가 장롱위의 물건이나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벌벌 떠는 콩알보다 작은 담력의 소유자를 가지고 있는 나였다. 그런 창고의 모든 것들은 자연 나에게 두려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거기에 짓굿게 웃으시며 요즘 시골에 홍콩할매가 자주 다닌다고 하는데 조심해라 라고 말씀하시던 큰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자 그 두려움과 공포는 그 끝을 모르고 커져 내 조그마한 온몸을 덮쳐왔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컴컴한 구석 어딘가에서 무언가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온몸을 엄습해 오는 것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순간 그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구석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온몸이 움츠러들며 콩알만 했던 가슴은 아주 좁쌀만 해져 엄청난 공포가 조그만 몸으로 밀려 들어와 질끈 눈을 감아갔다. 뭐지 귀신인가?? 아님 괴물?? 뭐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가라..
그렇게 들어 주지도 않을 누군가에게 애원하며 떨고 있던 순간 손에 촉촉한 무언가가 느껴져 왔다. 공포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 귀신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간을 보는 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두려움에 나는 그저 눈만 꼭 감은 채 오들오들 몸만 떨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정체불명의 물체는 떠나지 않고 내 손끝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던 중 복슬복슬 부드러운 느낌까지 나는 것이 마치 솜털 부벼지는 것 처럼 간지럽기까지 한 감촉에 두려움 보다 궁금한 마음이 일어 살짝 감았던 눈을 떠갔다.
그리고 나는 내 손 옆에 붙어 있던 강아지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복슬복슬하고 부드러운 하얀 털을 가지고 똘망똘망 하게 생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털을 부비는 강아지. 지금까지 나를 공포 끝까지 몰아 넣었던 녀석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내가 마음에 든 듯 내 손가락을 햝고 있는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에 지금까지 무서웠던 것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그 귀여움에 미소를 지어갔다.
그것이 나와 도치의 첫 만남이었다.
도치가 큰아버지 댁 돌구가 난 새끼 강아지였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무단 외출로 엄청 혼날 때 들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도치와 나의 하루하루는 언제나 즐거웠다. 같이 들판을 뛰어다니고 같이 냇가를 놀러가고 같이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 다니는 등 마치 플란다스의 개의 파트라슈와 네로처럼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함께했다. 나는 도치를 누구보다 사랑해줬고 도치도 그 누구보다 나를 따랐다.
언제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시연이 녀석이 날 괴롭히기 위해 어른들 눈을 피해 나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자기 주인을 다치게 하려는 것을 알았을까?? 그 조그마한 몸에 어디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 도치 녀석은 시연에게 아직 대로 나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도치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시연이 자식은 지 주인도 몰라 보는 놈 이라는 말만을 남긴 채 도망 가 버렸고 나는 무사히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도치가 있을 때는 시연이는 나를 건들지 못했고 나 역시도 그 덕분에 여유롭게 시골의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행복했던 시간이 지나고 아버지가 예정했던 휴일이 모두 지나자 우리에게는 자연스레 이별의 시간이 왔다.
<싫어!!싫어!! 나 도치랑 같이 있을꺼야!!>
<안돼..강혁아..도치 집은 여기고 강혁이 집은 서울이잖아..너 여기서 살꺼야??>
<엄마..도치 내가 데려가면 안될까??내가 밥도 주고 똥도 치우고 다 할께..엄마 아빠 귀찮게 안하고 내가 다 알아서 할께...안될까??>
<어서 개를 키울라고 해!! 안돼!!>
<바보 누난 조용히 해!! 엄마..제발....아빠...>
<강혁아...도치도 엄마랑 식구들이랑 같이 살아야지...혼자 외롭게 만들꺼야??>
<나...나 있잖아...내가 도치 안 외롭게 맨날 붙어 있을께..응??>
<학교는 어떡하고??>
<음...학교 같이 다니면 되지...그러니까..>
<웃긴다..왜 그냥 학교 때려치고 같이 산다고 하지..>
<지연아!!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아빠도 참.. 얘 하는 것 좀 보세요..막 때만 쓰면 다 되는 줄 알잖아요..>
<우리 강혁이 어쩌면 좋니...>
도치를 꼭 껴안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엄마의 말에도 나의 고집은 좀처럼 꺽이지 않았다.
<데려가라고 해라..>
언제 왔는지 내 뒤에는 큰 아버지가 인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찬찬히 허리를 숙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큰아버지.. 그 투박하고 큰손이 나에겐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혁아..이 강아지가 그렇게 좋으니??>
<네..전 세상에서 도치가 젤 좋아요!!아..아니..엄마아빠큰아버지 다음으로 네 번째로 좋아요!!>
<이름이 도치구나..그럼 데려가서 좋은 거 많이 먹이고 외롭지 않게 잘 키워야 한다. 알았지?>
<정말요??>
<그럼 정말 이고말고..여기선 큰아버지가 대장이라 큰아버지가 하라고 하면 다하게 되있어.그렇지?>
큰 아버지는 짖꿎은 표정을 지으며 찬찬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큰아버지의 갑작스런 행동에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신난다!! 도치야 우리 안 헤어져도 된대!! 너도 좋지?? 좋다고?? 그럴줄 알았어!!하하하!!>
지도 좋은 듯 왕왕 짖으며 대답하는 도치의 모습에 난 너무 신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때 그 때를 쓴 걸 평생 후회하게 될 줄은..
도치와의 서울 생활은 즐거웠다. 도치가 가족들과 떨어져 우울해 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내가 있어선지 이내 우리 집에 적응 했고 나 역시도 약속한대로 부모님께 폐를 끼치지 않기위해 도치의 밥과 배설물 청소, 목욕 등은 나 혼자의 힘으로 해 나갔다.
가끔씩 누나의 구박이 있긴 했지만 누나도 도치가 그리 싫지는 않은 듯 금방 잠잠해 졌다.
그렇게 나와 도치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행복이었고 기쁨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행복 뒤엔 언제나 무서운 슬픔이 또아리 트고 있다고..정말 옛말은 틀린 게 없는 것 같다. 슬픔은 언제나 행복 뒤에 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느끼지도 못할 사이에 덮쳐드니..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여지없이 닥쳐왔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 왔다. 갓 장마가 시작 되서 그런지 여기 저기서 호우 주위보가 내리고 경계령이 내리는 등 전국이 비 때문에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 나였지만 TV나 선생님의 말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위험하다는 것은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아침 학교를 가려던 나는 문가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도치의 눈길을 외면 할 수 없었다. 그 눈은 마치 나도 데려가줘...무서워..라고 말하는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더군다나 내가 학교에 있을 때 마다 집에서 도치를 봐주시던 어머니마저 일이 생겨 집에는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의 걱정은 더 했다.천둥은 치고 바람은 불고 그리고 텅 빈 집안에 혼자 있을 우리 도치를 생각하니 도저히 혼자 두고 갈수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도치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도치야~~우리 학교 같이 가자~>
<왕!!왕!!>
지도 역시 좋다는 듯 대답하는 도치를 데리고 나는 그렇게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의 도치의 인기는 대단했다. 원체 털이 하얗고 큰 눈을 가져 귀여움이 넘치던 도치였기에 아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것은 순식 간 이었다. 심지어는 여기저기서 서로 도치를 안아 보겠다고 달려 들다가 넘어진 아이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보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도치야~ 오늘 재미었지?? 담에도 또 학교에 가자~~>
<왕!!왕!!>
또 다시 좋다며 도치가 왕왕거려 왔다. 그렇게 내 말에 반응하고 나를 따르는 도치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그만 나이였지만 지금 이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어느새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우리는 천천히 신호를 기다렸다.
<어..비 오네..도치야 잠깐...아빠가 우산 씌워줄게 여기 잠깐만 있어>
안고 있던 도치를 땅에 내려놓은 나는 우산을 꺼내기 위해 가방 문을 열었다. 가방 문이 어딘가 열려 있었던 걸까? 가방 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지며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하지만 우산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리던 나는 그 무언가를 미쳐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줍기 위해 따라가는 도치도...
<여깄다!! 도치야 아빠랑 우산 쓰자...도치야??>
사라진 도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나는 이내 횡단보도에 서있는 도치를 발견했다. 언제 물었는지 조그마한 입엔 동그란 구슬이 하나 물려져 있었다.
<도치야...일루..>
퍽!!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순식간에 눈앞으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그 바람에 잡고 있던 우산이 날라 가 저 멀리 떨어져 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내 귀에 들어 왔다.
<도치야...>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트럭이 지나간 그 자리에 도치는 없었다. 핏물과 내장에 뒤섞여 이상한 색을 나타내고 있는 털과 잔뜩 짜부라져 버린 살집이 도치가 있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 내가 사랑하는 도치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헛구역질 하는 소리와 어떻게 된 일인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도치야..어딨어..일루와...집에 가야지..>
역시...대답은..없었다...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 짖던 녀석인데..
또르르 소리를 내며 발 밑으로 구슬 하나가 굴러와 닿았다. 저번에 동네 꼬마에게 땄던 초록색의 고운 구슬이.. 영롱한 색깔이 보석 같아 맨날 가방에 넣어 가지고 넣어다니며 도치에게 자랑했던 구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군데군데 살점으로 보이는 것이 붙어있어 처음 봤을 때의 영롱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 구슬을 집었다. 자그마한 손에 미끌미끌하고 끈적한 핏물과 살점 같은 것이 묻어 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진 것 마냥..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내 몸 위로 촉촉이 빗물이 흘러 내린다. 빗물은 내 몸을 적시고 땅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시고 바닥에 흐른 핏물을 적셔갔다. 그렇게 모든 흔적을 쓸어내리듯 천천히 모든 것을 적셔갔다.
<도...치야...>
그렇게 나는 도치와 헤어졌다.
왜 갑자기 생각이 난건지 모르겠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눈물이 왜 나는 거지?? 아직도 슬픈건가??
<뭐야 이 자식.. 울고있네... 꿈 속에서 차이기라도 했나??>
슬픈 감성을 느낄 시간도 기다려 주지 않고 내 귓가를 타고 낯설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래를 한 움큼 씹고 말을 한다면 이런 목소리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거칠고 걸걸한 목소리에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려갔다.
순간 푸우~~하고 뭔가 분사되는 소리와 함께 내 얼굴 위로 단번에 기분 나쁜 물기가 내려앉아왔다. 없던 정신도 번쩍 들 만큼 낯선 그 감촉에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려던 정신에 가속도를 붙이며 감은 눈을 뜨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갔다.
뭐,,,뭐야..
얼굴 전체에 묻어 버린 기분 나쁜 물기를 닦아내며 이내 완전히 정신을 차려가자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가 코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물은 아니다..물은 냄새가 없는 무색 무취의 액체라는 건 초등학교만 제대로 이수해도 다 알수 있는 사실이니까..뭐지?? 맡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싸하고 머리가 핑도는 게 혀가 저절로 꼬부라질 것 같은 이 냄새는?? 어딘가 익숙한 냄새... 술이다.. 그것도 소주..
누가 민감한 사춘기 청소년 얼굴에 소주를 뿌린거냐!! 가뜩이나 요즘 부쩍 피곤한 일이 많아서 피부에 트러블 생겨서 짜증나죽겠는데.. 나 같은 평범한 얼굴에는 여드름 하나도 독이 될 수 있단 말이다.
<내가 뿌렸다..기절한 사람 깨우는데는 이게 직빵이거든..>
아까 잠결에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십년 묵은 가래라도 낀 것 마냥 걸걸한 목소리에 궁금증이 일러 주위를 둘러보지만 텅 빈 공간에 보이는 거라곤 내 몸뚱이와 내 팔 근처에서 나를 바라 보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 정도가 전부였다. 가만...강아지?? 이상한 생각에 나는 그 강아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손엔 자기 얼굴 만 한 소주병을 다른 한손엔 할아버지들이 쓰는 곰방대처럼 보이는 작대기를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 강아지는 포부도 당당하게 두발로(?) 서있었다. 약간 삐딱하게 서있는 듯 한 포즈가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옛날에 배웠던 포유류의 특징들에 대해서 잠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책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상식은 있는 나다. 내 짧은 지식 안에서도 강아지는 포유류였지 두발로 설수 있는 영장류는 아니었다..그런데도 분명히 저 강아지는 자신의 근본도 모른 채 두발로 당당히 서 있었다..그리고 저 익숙한 모습...
크고 동그란 눈 가득 검은 눈동자가 차 있고 하얀 털이 솜처럼 복실거리는 게 영락없이 우리 도치랑 꼭 닮은 강아지다. 하지만 달랐다. 풍겨오는 분위기도 달랐고 전체적인 이미지도 달랐다. 술이라도 취한 듯 초점 없는 눈동자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음침함이 느껴지는 저 얼굴..
분명 저건 도치가 아니었다. 아까 그 강아지다. 아까 차 앞에서 병신같이 서 있다가 내가 구해주려고 하니까 지만 쏙 빠져버린 치사한 강아지. 덕분에 나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이상한 곳에서 깨어나 버렸고.. 암튼 더럽게 재수 없고 짜증나는 강아..악!!
갑작스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 좌측 상단을 강타하는 강한 통증에 나는 머리를 쥐어 싸며 신음했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뭐 병신?? 더럽고 재수없어??
기껏 어린 목숨 불쌍해서 살려줬더니 뭐?? 치사해?? 이거 아주 웃긴 놈 아냐??>
말을... 했어?? 방금 머리를 맞은 아픔도 잊은 채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앞의 강아지를 바라봤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눈앞의 강아지는 여느 다른 개들처럼 왈왈이나 멍멍으로 이루어진 의미 불명의 의성어가 아니라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는 언어체계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 배우기 힘들다는 한국말로.. 뭐가 그리 열 받는지 보이지도 않는 짧은 목에 핏대 까지 세우며 말이다.
뭐지?? 유전자 조작인가?? 아님 내가 강아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됐나? 사고의 후유증으로??
<조작은 무슨 조작이야.. 그리고 니가 동물에 왕 타잔이냐 동물 말을 알아듣게..>
<그럼 어떻게??>
<이 몸이 말을 할 줄 아니까 니가 듣는거지..내가 말을 탈줄 알아서 이렇게 너랑 대화 하겠냐??>
더럽게 재미없는 개그다...말 배우면서 개그는 못 배웠나 보다. 그나저나..여긴 어디지?? 나는 분명히 차에 치었는데... 혹시 천국인가?? 그럼 말이 된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천국에는 말하는 강아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난 죽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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